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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폭설(暴雪)/ 오탁번

글라디올러스 2008. 3. 24. 19:28
폭설(暴雪)/ 오탁번



〔금주의 시〕폭 설


                                   * 시/ 오탁번


삼동(三冬)에도 웬만하면 눈이 내리지 않는
남도(南道) 땅끝 외진 동네에
어느 해 겨울 엄청난 폭설이 내렸다
이장이 허둥지둥 마이크를 잡았다

- 주민 여러분! 삽 들고 회관 앞으로 모이쇼잉!
  눈이 좆나게 내려 부렸당께!

이튿날 아침 눈을 뜨니
간밤에 또 자가웃 폭설이 내려
비닐하우스가 몽땅 무너져 내렸다
놀란 이장이 허겁지겁 마이크를 잡았다

- 워메, 지랄나부렸소잉!
  어제 온 눈은 좆도 아닝께 싸게싸게 나오쇼잉!

온종일 눈을 치우느라고
깡그리 녹초가 된 주민들은
회관에 모여 삼겹살에 소주를 마셨다
그날 밤 집집마다 모과빛 장지문에는
뒷물하는 아낙네의 실루엣이 비쳤다

다음날 새벽잠에서 깬 이장이
밖을 내다보다가, 앗!  소리쳤다
우편함과 문패만 빼꼼하게 보일 뿐
온 천지가 흰 눈으로 뒤덮여 있었다
하느님이 행성(行星)만한 떡시루를 뒤엎은 듯
축사 지붕도 폭삭 무너져 내렸다

좆심 뚝심 다 좋은 이장은
윗목에 놓인 뒷물대야를 내동댕이치며
우주의 미아가 된 듯 울부짖었다

- 주민 여러분! 워따. 귀신 곡하겠당께!
  인자 우리 동네 몽땅 좆돼 버렸쇼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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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자 소개 - 오탁번(吳鐸藩)    

1943년 충북 제천에서 태어나 고려대 영문과 및 동 대학원 국문과를 졸업했다. 『동아일보』(1966)와 『중앙일보』(1967) 신춘문예에 동화와 시가 각각 당선되고, 1969년 『대한일보』 신춘문예에 소설 「처형(處刑)의 땅」이 당선되어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낭만적 순수 가치가 온전히 추구될 수 없는 고통스러운 현실 세계를 부정하거나 거기서 좌절하는 인물들의 삶을 그려왔으며, 암담한 시대를 살아가는 두 젊은 지성의 상반된 행로를 그린 「굴뚝과 천장」을 비롯해 「새와 십자가」 「세우(細雨)」 등이 있다.





출처 : 마라톤사랑방
글쓴이 : 천리마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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