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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이원규의 지리산 가을 편지 1

글라디올러스 2007. 10. 2. 09:13

시인 이원규의 지리산 가을편지 1

 

 

    가을 단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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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가을에 문득 생각하니 길이 곧 집이었습니다.

 

집 밖에 그 어디론가 향하는 길이 있으리라 믿었지만 그게 아니었지요.

모든 길이 곧 집이었습니다. 집과 길은 자웅동체의 한 몸이었습니다.

점과 점을 이으면 선이 되듯이 집과 집을 이으면 그게 바로 길이었지요.

 

하지만 21세기 현대인들의 집은 무엇인지요.

일평생 집 한 채 장만하기 위해 몸부림치다 죽어 두 평의 집, 무덤 하나 가지는 게

인생의 전부라면 길은 어디에 있는지요.

집과 무덤으로 곧바로 향하는 무한질주의 행로 속에

과정으로서의 길은 적당히 생략되어도 좋은지요.

 

길이 곧 집이라는 사실을 외면한 채

집착과 욕망으로서의 집만 존재할 때 오히려 우리는 자주 길을 잃게 됩니다.

 

그리하여 이 가을에 벌초를 하고 성묘를 하는 것 아닌지요.

벌초와 성묘는 감사와 반성과 참회의 한 양식입니다.

이 세상을 물려준 조상에 대한 감사의 큰절이자 무언가 잘못 살아온 날들에 대한 참회요,

새로운 다짐의 소중한 의식입니다.

 

살다보면 너무나 힘들고 앞길이 캄캄할 때

우리는 소중했던 이들의 무덤을 찾아갑니다.

적당히 슬프고 적당히 힘들 때는 무덤을 찾지 않지요. 왜 그럴까요.

평상시에는 정신없이 잊고 살다 집에서 무덤으로 이어지는 인생,

그 과정의 실체를 바로 보는 계기가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이미 죽은, 소중했던 이들이 행여 우리의 삶을 통째로 바라보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섞인 자기 성찰, 이것이 오히려 삶을 풍성하게 합니다.

 

하여 우리가 죽어 마침내 무덤을 집으로 삼을 때

후세들에게 물려줄 ‘21세기 타임캡슐’은 지구를 덮어가는 쓰레기 매립장이나 무덤뿐만이 아닙니다.

바로 집과 무덤 사이의 무한한 공간과 시간의 길이지요.

 

그대가 오늘 지금 이 순간에 하나 둘 찍고 있는 발자국들의 화석,

그것이 바로 21세기의 타임캡슐이자 희망의 길이 아닌지요.

 

그대의 발자국이 더욱 선명해지는 가을입니다.

출처 : 지리산(智異山)
글쓴이 : 피아산방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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